결혼식만큼 한 여자의 취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이벤트가 또 있을까? 남자를 보는 눈부터 꽃과 케이크를 고르는 안목까지, 그간 켜켜이 쌓아온 취향이 한꺼번에 드러나는 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웨딩드레스는 그중 단연 하이라이트다. 결혼식에 크게 의미 부여를 하지 않는 내게도 웨딩드레스는 어떤 상징이다. 물론 ‘인생에 단 한 번뿐’, ‘오직 신부만을 위한 날’처럼 결혼식을 둘러싼 케케묵은 수식어에 오래도록 세뇌된 탓도 있다. 티끌 없이 하얗고 깨끗한 드레스는 기나긴 인생에서 딱 한 번만 누릴 수 있는 신성불가침한 기회처럼 보인다.









1969년 지브롤터의 해안가에서 결혼증명서를 든 채 기념사진을 촬영한 오노 요코와 존 레논





1969년 지브롤터의 해안가에서 결혼증명서를 든 채 기념사진을 촬영한 오노 요코와 존 레논








MM6 메종 마르지엘 라 2020 S/S 웨딩 캡슐 컬렉션 'BETTER HALFISM'





MM6 메종 마르지엘라 2020 S/S 웨딩 캡슐 컬렉션 'BETTER HALFISM'

어릴 땐 응당 결혼식에는 화려한 렌털 숍 드레스를 입는 게 불문율인 줄 알았다. 내 맘에 쏙 들진 않지만 말이다. 누구도 강요한 적은 없다. 하지만 ‘스드메’ 웨딩 패키지와 더불어 미디어에서 보고 들은 보통의 한국 결혼식은 늘 그런 식이었다. 그리고 그게 어른의 방식이라 굳게 믿었다. 오노 요코와 존 레논의 결혼식에서 영감을 얻은 MM6 메종 마르지엘라 의 2020 S/S 웨딩 캡슐 컬렉션을 종종 꺼내보며 먼 훗날 나의 웨딩드레스를 상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분명 다수가 아닌 소수의 케이스였고, 어디 가서 몽상가란 소리만 듣기 딱 좋았다. 옷을 사랑하는 이들마저 웨딩드레스만큼은 예외인지 ‘드레스 투어’ 앞에서는 마치 수능을 목전에 둔 고등학생처럼 굴었다. 이토록 복잡한 결혼식 준비 과정을 하나하나 헤쳐나가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당연한 과업인 것처럼.

한국에서 나고 자란 밀레니얼 세대라면 오늘날 결혼식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웨딩홀 대관료와 식대, 온갖 비상식적인 룰로 점철된 웨딩업계의 메뉴판에도 불구하고 신부들은 부모님 세대의 ‘ 뿌린 대로 거두리라 ’식 축의금 문화에 부응하기 위해 먼 길을 떠난다. 그 앞에는 끝없는 ‘추가금 파티’와 아직 아무도 입지 않은 신상 드레스를 쟁취하기 위한 치열한 전투가 도사린다. 심지어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자유롭게 만져보고 입어볼 수도 없다. 비록 1차전에서 장렬히 전사했을지언정, 포기하지 않고 ‘비즈파’와 ‘실크파’를 집요하게 저울질해가며 차선의 드레스를 찾아내도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수많은 전우가 거쳐 간 드레스는 수차례의 가봉과 세탁으로 이미 현현한 빛을 잃은 지 오래다. 게다가 예식 몇 시간 뒤면 이름 모를 다음 신부에게 바삐 전해진다.
공장의 고장 난 컨베이어 벨트처럼 곪아 터져 나오는 웨딩 산업의 병폐를 굳이 지금 장황히 늘어놓고 싶진 않다. 결혼식이 인생 전체를 놓고 봤을 때 무시 못 할 이정표인 건 분명하다. 하지만 동시에 여느 때처럼 흘러가는 하루이기도 하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하루를 나답지 않은 것들로 채우고 있다는 사실을 점점 더 많은 여자들이 눈치채고 있다. 대다수의 여자들이 그간 등 떠밀리듯 바삐 지나온 버진로드를 새 시대의 신부는 찬찬히 돌아보기 시작한 것이다.
해답은 대개 덜어내는 데에 있다. 웨딩드레스라면 필경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한다는 사회의 거추장스러운 참견을 과감히 걷어내고, 내 욕망을 정확히 마주할 필요가 있다. 지나치게 길고 무거운 드레스 탓에 헬퍼의 도움 없이는 한 걸음도 편히 내딛지 못하는 것이 정말로 내가 원하는 모습일까? 영화 〈서브스턴스〉로 스타덤에 오른 배우 마거릿 퀄리 는 발끝에 겨우 닿는 산뜻한 샤넬의 홀터넥 드레스를 걸친 채 웨딩마치를 올렸다. 화려한 트레인이나 장식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심지어 발끝에는 높은 힐 대신 편안한 메리 제인이 자리했다. 바람처럼 가벼운 웨딩 슈즈는 정말로 그를 좋은 곳으로 데려다줄 것만 같았다. 신부대기실에 인형처럼 앉아있는 대신 건강한 두 다리로 예식장을 자유롭게 누비며 손님을 맞이하는 신부의 모습은 틀림없이 내가 오래도록 꿈꿔온 장면이다.



어머니가 손수 제작한 웨딩드레스를 걸친 채 웨딩마치를 올린 디자이너 수잔 팡


진정한 아름다움은 어쩌면 가장 개인적인 것에서 움틀지도 모른다. 런던 기반 디자이너 수잔 팡 은 어머니가 손으로 직접 수천 개의 튤 꽃잎을 겹겹이 쌓아 만든 3D 에어플라워 웨딩드레스와 함께 버진 로드를 밟았다. “전통적인 웨딩드레스가 아닌 피어나는 축복과 생명을 상징하는 무언가를 입고 싶었다”는 그는 디자이너와 딸로서의 자아를 드레스에 모두 녹여냈다. 그런가 하면 뉴욕 기반 디자이너 샌디 리앙 은 자신의 뿌리로 돌아갔다. 부모님이 운영하는 퀸즈의 중식당에서 치파오를 입은 채 사랑하는 사람들과 전통 음식을 즐긴 신랑과 신부는 가라오케에서 완벽한 밤을 마무리했다. 찰리 XCX 는 Z세대를 열광케한 브랫걸답게 수많은 신부의 로망인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드레이핑 디테일 드레스에 선글라스를 쓴 채 등장했다.









플로럴 코사주 디테일의 마그다 부트림 드레스를 선택한 김나영





플로럴 코사주 디테일의 마그다 부트림 드레스를 선택한 김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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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에서 비비안 웨스트우드 웨딩 드레스를 걸친 '캐리 브래드쇼'로 분한 사라 제시카 파커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에서 비비안 웨스트우드 웨딩 드레스를 걸친 '캐리 브래드쇼'로 분한 사라 제시카 파커

웨딩드레스가 반드시 하얘야 한다는 것도 옛말이다. 얼마 전 많은 이의 축복 속에 결혼식을 올린 김나영 은 가을 하늘처럼 푸르른 마그다 부트림 드레스를 선택했다. 맑고 밝은 하늘색은 그 누구도 아닌 김나영다웠다. 두 아들과 함께 매사에 온기 어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마음껏 울고 웃을 줄 아는, 그러면서도 자신만의 선명하고 곧은 세계를 잃지 않는 여성. 그의 오랜 스타일리스트가 오직 김나영만을 위해 제작한 세상에 단 하나뿐인 크로셰 베일도 그가 얼마나 다정한 사람인지 잘 말해준다. 모델 최소라 와 사라 제시카 파커 도 우아한 흑조를 닮은 블랙 웨딩드레스로 보란 듯이 금기를 깼다. 정작 사라 제시카 파커가 연기한 〈섹스 앤 더 시티〉 속 화려한 뉴요커 ‘캐리 브래드쇼’는 모두가 찬탄해마지않는 새하얀 비비안 웨스트우드 브라이덜 드레스를 몇 번이고 걸쳤지만 말이다.

정답은 없다. 특이한 드레스와 뻔하지 않은 스몰 웨딩이 무조건 옳다는 게 아니다. 세모난 드레스를 입든, 우주에서 피로연을 하든 결국 먹고 사는 문제도 아닌 오롯이 취향의 영역이다. 단, 내가 아닌 다른 이의 욕망을 쫓는 건 아닐지 한 번쯤 의심해볼 필요는 있다. 물론 이마저도 개인의 선택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웨딩드레스는 렌털 숍 바깥에 있다. 그건 엄마가 물려준 1960년대 영국 빈티지 드레스일수도 있고, 지금 가장 뜨거운 신진 디자이너의 명랑한 드레스가 될 수도 있다. 반대로 누군가는 진정으로 원하던 엘리 사브의 드레스를 렌털 숍에서 빌릴 수도 있다. 그저 어린 날의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여자들에게 더 많은 선택지가 있음을 이야기해주고 싶다. 웨딩드레스도 결국엔 드레스일 뿐이고, 가장 내 마음에 드는 걸 고르면 그만이라고.